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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300년 전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Maltaboka 2025. 7. 12. 15:27

목차(Contents)


    들어가며

    어릴 적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 기억하시나요? 작은 사람들이 사는 릴리퍼트에서 거인이 된 걸리버, 거인들이 사는 브롭딩낵에서 개미만큼 작아진 걸리버. 그저 신기한 모험 이야기로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전혀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익숙하지만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걸리버의 마지막 네 번째 여행지인 ‘휘님(Houyhnhnm)’, 즉 말(馬)이 이성적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다시 방문해 보려고 합니다. 저와 함께 가볼까요?

     

    📚 걸리버 여행기 원문 출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와 그의 시대 비판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18세기 영국의 사회와 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지닌 작가였습니다. 그가 1726년에 쓴 『걸리버 여행기』(원제: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 by Lemuel Gulliver)는 당시 영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었죠. 겉으로는 재미있는 여행기 같지만, 사실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이었던 겁니다.

     

    첫 번째 항해에서 걸리버는 릴리퍼트라는 소인국에 도착합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키가 약 15cm에 불과하지만, 내부 정치 싸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거대한 걸리버 앞에서도 서로 다른 굽 높이의 신발을 신은 정치 세력이 갈등을 벌이고, 삶은 달걀을 어느 쪽 끝부터 까야하는지를 두고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의 사소하고 파벌적인 다툼과도 닮아있습니다.

     

    두 번째 여행지인 브롭딩낵이라는 거인국에 들어가게 된 걸리버는 자신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인간 문명의 규범들이 오히려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거인 왕으로부터 “당신네 나라는 야만국”이라는 평가를 받는 장면은 도덕성과 문명의 상대성을 날카롭게 보여주며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마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처럼 말입니다.

     

    세 번째 항해라퓨타라는 공중에 떠 있는 섬과 그에 부속된 여러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이곳 사람들은 음악과 수학에 집착하며 현실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죠. 스위프트는 이를 통해 당시 과학만능주의, 비현실적 이론의 허망함, 그리고 사회와 동떨어진 지식인의 오만함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어려운 난제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강렬한 비판, 휘님의 나라

    마지막 네 번째 항해에서 걸리버는 ‘휘님(Houyhnhnm)’이라 불리는 고귀한 말들이 지배하는 나라에 도달합니다. 이곳의 휘님들은 외형은 말과 같지만, 고도의 이성과 윤리를 갖춘 존재들로, 거짓말이나 배신, 욕망과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이런 개념 자체가 없으니 말 그대로 유토피아인 셈이죠.

    반면, 인간과 닮은 야후(Yahoo)들은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비도덕적인 야만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아, 이들이 인간이라고? 절대 안 돼!"라고 부정할 정도로 야후를 싫어합니다.

    걸리버가 휘님들에게 인간 사회의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목은 섬뜩할 정도로 오늘날과도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 "가난한 나라는 굶주리고, 부유한 나라는 오만하다. 오만과 굶주림은 항상 충돌한다." 즉, 빈곤은 불만을 낳고, 부는 오만을 부르며, 이 둘이 충돌하여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이죠.
    • 법정의 현실: "돈을 주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된다." 변호사비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 사회 불평등: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범죄라도 저질러야 살 수 있는 구조는 300년 전에도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00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 봐도 너무 지금과도 닮아있지 않나요? 시대를 초월한 인간 사회의 보편적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이 있습니다. 휘님들과 지내면서 걸리버는 인간 세계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가족마저 야후로 보일 정도로 극단적이 되죠. 그런데 그가 "인간은 다 별로야!"라고 하는 그 모습 자체가 그가 비판하던 인간의 오만함 그 자체라는 거예요. 완전히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비판이죠.

    예를 들어, 그를 구조한 페드로 데 멘데스 선장의 친절을 걸리버가 "당신도 야후잖아"라며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 결국 그도 또 다른 형태의 야후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것이 바로 메타적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죠.


    3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300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날의 현실과도 너무 닮아있습니다. 정치권의 끝없는 언쟁,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갈등,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각종 혐오 표현들… 스위프트가 그때 비판했던 인간의 모습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요즘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는 우리에게 "정답은 이거야!"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계속해서 질문하게 만들죠.

    • 우리는 정말 이성적인 존재일까?
    •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 인간의 본성은 바뀔 수 있을까?
    • 휘님 같은 존재가 되는 게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그 부담스러움이 이 책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3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죠.


    마치며

    걸리버가 여행을 다녀온 지 300년이 지난 지금, 휘님처럼 고귀하고 이성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여전히 걸리버의 모습을 닮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 곁에는 여전히 휘님 같은 존재들이 함께하고 있고, 그들과 나누는 신뢰와 사랑, 그것이야말로 걸리버가 마지막으로 깨달은 진정한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그 재미있는 모험 이야기... 다시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분명히 완전히 다른 느낌을 가지실 겁니다.